니프티 피프티: 한 번만 사는 주식과 1973~74년 폭락
1973년 1월 11일 S&P 500은 120.24로,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1,051.70으로 마감했습니다. 두 지수 모두 그때까지 도달한 적 없는 최고치였습니다. 그날 저녁 리처드 닉슨은 텔레비전에 나와 경제 정책의 3단계를 발표하며, 1971년 8월에 도입된 강제적 임금·물가 통제의 대부분을 해제했습니다. 월가는 그 전까지 열네 달 동안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행정적으로 제어되었다는 전제 위에서 주식을 사들여 왔습니다.
두 지수 모두 그 수준을 다시 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S&P는 1980년 여름이 되어서야 120.24를 넘어 마감했습니다. 다우는 1982년 11월, 거의 10년이 지나서야 1,051.70을 넘어섰습니다.
뒤이은 스물한 달 동안 가장 크게 떨어진 것은 투기적인 종목들이 아니었습니다. 기관 자금 운용자들이 앞선 4년 동안 보유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주식이라고 결론지어 온, 규모가 크고 이익을 내며 이름이 널리 알려진 쉰 개 남짓의 기업들이었습니다.
한 번만 사면 되는 주식
공식 명단을 발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명칭은 1972년 무렵 업계 언론에서 나왔고, 그 뒤에는 두 개의 목록이 돌아다녔습니다. 미국 최대 은행 신탁부서였던 모건 개런티 트러스트가 하나를 관리했고, 키더 피바디가 또 하나를 관리했습니다. 두 목록은 크게 겹쳤지만 일치하지는 않았으며, 이 집단의 이후 성과를 둘러싼 논쟁이 끝내 정리되지 않은 이유의 일부가 여기에 있습니다.
개별 종목의 이름은 평범했습니다. 코카콜라, IBM, 제록스, 제너럴 일렉트릭, 프록터 앤드 갬블, 이스트만 코닥, 존슨 앤드 존슨, 맥도날드, 월트 디즈니, 폴라로이드, 에이본 프로덕츠, 머크, 화이자, 필립 모리스, 텍사스 인스트루먼츠, 시어스 로벅, 인터내셔널 플레이버스 앤드 프래그런스, 슐럼버거, 디지털 이큅먼트 같은 회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제약과 소비재, 사진, 컴퓨팅, 유전 서비스에 걸쳐 있었습니다. 이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10년 이상 끊긴 적 없는 이익 성장의 기록이었습니다.
그 기록에서 이 시기를 규정한 표현이 나왔습니다. 이들은 한 번만 결정하면 되는 주식이었습니다. 사겠다는 결정을 내리면, 언제 팔지에 관한 두 번째 결정은 필요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연 15퍼센트로 이익을 무한히 복리로 불리는 기업이라면 결국 어떤 가격도 따라잡는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런 주식을 파는 일은 양도소득세를 내고, 그 대금을 어디에 넣을지 다시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이 발상에는 신탁부서 내부에서 보면 이치에 맞는 기관적 논리가 있었습니다. 기업 고객의 연금 자산을 운용하는 은행은 터져 버린 종목을 보유했다는 이유로 해임될 수 있었습니다. 코카콜라를 보유했다는 이유로 해임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흠잡을 데 없는 종목에 집중하는 것은 투자 논리이기 이전에 경력 위험을 다루는 거래였고, 1972년에 이르러서는 막대한 자금이 그 거래를 택한 상태였습니다.
총잡이들 이후
이 합의의 모든 요소는 그 앞 시대에 대한 반작용이었습니다. 1960년대의 월가는 성과 운용자들의 시대였습니다. 맨해튼 펀드의 제럴드 차이와 엔터프라이즈 펀드의 프레드 카가 대표적이었고, 이들은 복합기업과 프랜차이즈 업체, 신규 발행 주식을 높은 회전율로 매매하며 그 성적을 숫자로 내보였습니다. 그 시장을 당대에 기록한 존 브룩스는 펀드 성과가 타율처럼 매달 보도되고 포트폴리오 매니저가 유명 인사가 된 10년을 묘사했습니다 (Brooks, 1973).
그 시장은 1969~70년의 약세장에서 끝났습니다. S&P는 약 36퍼센트 하락했고, 고고 펀드 가운데 몇몇은 아예 사라졌습니다. 1970년 6월 펜 센트럴 운송회사의 파산은 기업어음 시장을 얼어붙게 했고, 연방준비제도를 1930년대 이후 쓰인 적 없는 방식으로 재할인 창구에 나서게 만들었습니다. 투기적인 종이 자산을 사들이던 이들에게는 고약한 2년이었습니다.
성장주 투자는 더 상위 종목으로 옮겨 가며 이 시기를 견뎌 냈습니다. 복리로 불어나는 이익에 대한 욕구는 사라지지 않았고, 다만 2류 복합기업에서 미국에서 가장 크고 가장 확립된 성장 기업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곳에서는 아무런 위험도 없어 보였습니다. 금융 기자들은 그 결과를 이중 시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쉰 개 종목과 나머지 전부가 더 이상 같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배수
1972년 말이 되자 그 논리에 붙은 가격은 1929년을 빼면 미국에 전례가 없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제러미 시겔은 모건 개런티 목록을 바탕으로 1972년 12월 이 집단의 평균 주가수익비율을 41.9배로, S&P 500 전체의 18.9배와 견주어 계산했습니다 (Siegel, 1998).
| 기업 | 주가수익비율, 1972년 12월 |
|---|---|
| Polaroid | 94.8 |
| MGIC Investment | 83.3 |
| McDonald's | 82.6 |
| International Flavors & Fragrances | 75.8 |
| Walt Disney | 71.2 |
| Avon Products | 61.2 |
| Johnson & Johnson | 57.1 |
| Digital Equipment | 56.2 |
| Coca-Cola | 46.4 |
| Xerox | 45.8 |
| IBM | 35.5 |
| S&P 500 평균 | 18.9 |
그 정도 배수에는 구체적이고 검증 가능한 주장이 담겨 있습니다. 이익의 90배에서는 기업이 아주 오랫동안 아주 빠르게 이익을 늘려야 매수자의 돈이 회수되며, 그 계산에는 중단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94.8배의 폴라로이드에는, 그해 10월에 180달러로 출시되어 한 대 팔 때마다 손실을 내던 SX-70 즉석 카메라가 한 세대 동안 회사를 먹여 살릴 것이라는 가격이 매겨져 있었습니다.
Source: Standard & Poor's index history
스물한 달
1973년 1분기에는 극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가격은 그저 오르기를 멈추고 완만하게 깎여 나가기 시작했으며, 보유자들에게는 이것이 잠시 쉬어 가는 국면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기회가 충분히 주어졌습니다.
그 아래에서 통화 질서는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1971년 8월 달러 태환 정지는 스미스소니언 협정으로 봉합되었지만, 그 봉합은 실패했습니다. 1973년 2월 12일 재무부는 달러를 두 번째로, 이번에는 10퍼센트 평가절하했습니다. 3월에는 주요 통화들이 변동환율로 옮겨 갔고 브레턴우즈에서 세운 고정환율 체제는 사실상 소멸했습니다. 3단계 통제는 6월에 60일간의 동결 조치로 다시 도입되었는데, 이미 잡혔다던 인플레이션에 관해 시장이 듣고 싶어 할 소식은 아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누구의 이익 모형에도 들어 있지 않던 충격이 닥쳤습니다. 1973년 10월의 욤 키푸르 전쟁과 뒤이은 금수 조치는 아라비안 라이트 원유의 고시가격을 배럴당 2.90달러에서 1974년 1월까지 11.65달러로 끌어올렸습니다. 1973년에 6.2퍼센트였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74년에 11.0퍼센트에 이르렀습니다. 연방기금금리는 1974년 7월까지 약 13퍼센트로 밀어 올려졌습니다.
이 숫자들은 하나하나가 높은 배수를 직접 겨냥합니다. 20년 뒤의 이익에 근거해 값이 매겨진 주식은 만기가 긴 자산이며, 할인율이 두 배가 되면 경기민감주보다 현재가치가 더 크게 떨어집니다. 로버트 실러의 장기 시계열을 보면 시장 전체의 경기조정 주가수익비율은 1973년 초의 약 19배에서 1974년 말 9배 아래로 떨어졌는데, 기록에 남은 가장 가파른 밸류에이션 하락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Shiller, 2015).
금융 시스템의 일부는 1974년에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독일 감독 당국은 6월 26일 오후 헤르슈타트 은행을 폐쇄했고, 이미 마르크화를 지급하고 끝내 오지 않을 달러를 기다리던 거래 상대방들이 발이 묶였습니다. 미국에서 스무 번째로 큰 은행이던 프랭클린 내셔널 뱅크는 10월 8일 지급불능 판정을 받았으며, 당시로서는 미국 최대의 은행 파산이었습니다. 닉슨은 8월 9일 사임한 뒤였습니다. 제럴드 포드는 시장이 이미 바닥을 친 지 닷새 뒤인 10월 8일에 "인플레이션을 때려잡자"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S&P 500은 1974년 10월 3일 62.28로 마감했고, 이는 1973년 1월 고점 대비 48.2퍼센트 하락한 수치였습니다. 다우의 저점은 12월 6일 577.60으로, 45.1퍼센트 하락이었습니다.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가 5분의 1 넘게 올랐으므로 보유자의 구매력 손실은 57퍼센트에 가까웠습니다. 영국 투자자들의 사정은 더 나빴습니다. FT 30은 1972년 고점에서 1975년 1월 6일 저점까지 약 73퍼센트 떨어졌습니다.
쉰 개 종목에 벌어진 일
안전한 축이어야 했던 집단은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 기업 | 1972~73년 고점 | 1974년 저점 | 하락률 |
|---|---|---|---|
| Polaroid | 약 149.50달러 | 약 14.13달러 | 약 91% |
| Avon Products | 약 140달러 | 약 18.60달러 | 약 87% |
| Xerox | 약 171.88달러 | 약 49달러 | 약 71% |
에이본은 이 시기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렇다 할 공장도 없이 수십만 명의 방문 판매원을 거느린 화장품 회사가 미국 철강 산업 전체보다 높은 시가총액을 인정받았고, 1974년 말에는 한 자릿수 배수에 거래되었습니다. 폴라로이드의 SX-70은 작동했고 팔렸지만, 1972년의 가격이 요구한 수준에 근접하는 이익은 끝내 내지 못했습니다. 제록스의 일반 용지 복사 특허는 만료되기 시작했고 일본 경쟁자들이 들어왔으며, 이익의 45.8배를 정당화하던 성장률은 조용히 평범한 수치가 되었습니다.
버턴 맬킬의 서술은 배수를 담은 두 번째 열로 이 수축을 못 박습니다. 1980년이 되자 같은 종목들이 높은 한 자릿수와 낮은 10대 초반의 배수에 손바뀜하고 있었습니다. 에이본은 9배 근처, 맥도날드도 9배 근처, 디즈니는 11배 근처, 제록스는 8배 근처였습니다 (Malkiel, 2019). 이 기업들 대부분의 이익은 계속 늘고 있었습니다. 무너진 것은 그 이익에 사람들이 치르려는 가격이었습니다.
뒤따른 논쟁
25년 뒤 시겔은 이 물음을 다시 열었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답을 내놓았습니다. 모건 개런티의 쉰 개 종목을 1972년 12월 가격에 사서 1998년 8월까지 보유했을 때, 그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은 같은 기간 S&P 500의 수익률과 거의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차이는 1퍼센트포인트의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이어 그는 완전한 예지가 있었다면 시장 수익률을 안겨 주었을 가격, 곧 종목별 "정당화 가능한" 배수를 계산했고, 이 집단의 평균값을 실제로 지불된 41.9배에 대비되는 약 40.6배로 얻었습니다 (Siegel, 1998).
그렇게 읽으면 니프티 피프티는 거품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총량으로 보면 시장이 옳게 값을 매긴 대상이었고, 다만 그것이 옳았음이 입증되기까지 25년이 걸렸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총량은 엄청난 편차를 가렸습니다. 필립 모리스는 1972년 가격이 암시한 것보다 훨씬 큰 수익을 돌려주었습니다. 폴라로이드와 에머리 에어 프레이트는 보유자들을 영구히 망가뜨렸습니다. 집단을 사는 것과 그 안의 어느 한 종목을 사는 것은 같은 베팅이 아니었습니다.
제프 페젠마이어와 게리 스미스는 키더 피바디 목록으로 같은 작업을 다시 수행해 한층 강한 결론에 이르렀고, 그 집단이 지수와 같은 수준이 아니라 지수를 앞섰다고 보았습니다 (Fesenmaier and Smith, 2002). 두 비공식 목록 가운데 어느 쪽을 쓰느냐에 결론이 달려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문헌 전체에서 가장 정직한 발견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것도 1974년의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고, 주어졌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익의 41.9배에 사들인 연금 기금에는 1998년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돈이 필요했습니다. 투자위원회는 해산되었고, 운용역은 해고되었으며, 위임은 분기 단위로 측정된 성과를 근거로 다시 배분되었습니다.
잔해가 남긴 것
이 시기에서 두 개의 제도가 나왔습니다.
첫 번째는 의회가 내놓았습니다. 종업원퇴직소득보장법은 시장 바닥을 5주 앞둔 1974년 9월 2일에 서명되었고, 연금 수탁자에게 수탁자 기준을 부과해 쉰 개 종목에 분산 없이 집중하는 일을 단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 아니라 법적으로 위험한 선택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법은 적립 규율도 요구했으며, 그 결과 기업 연금은 측정 가능하고 벤치마크에 견주어지는 운용 쪽으로 밀려갔습니다.
다른 하나는 더 값쌌습니다. 존 보글은 1976년 8월 퍼스트 인덱스 인베스트먼트 트러스트를 출범시켰습니다. 바닥에서 열여덟 달이 지난 시점이었고, 집중된 액티브 운용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업계가 막 공개적으로 보여 준 뒤였습니다. 최초 공모는 목표 1억 5,000만 달러에 못 미치는 1,130만 달러를 모았고, 업계 언론은 이를 보글의 어리석은 짓이라 불렀습니다. 이 펀드를 끝내 피할 수 없게 만든 논거, 곧 평균적인 액티브 운용역은 수수료를 제하고 나면 지수를 이길 수 없다는 논거는 학술지에서 이미 10년째 제기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수표에 서명하는 사람들에게 몸으로 읽히게 만든 것이 1973~74년이었습니다.
| 날짜 | 사건 |
|---|---|
| 1973년 1월 11일 | S&P 500이 120.24로 정점; 닉슨이 3단계 발표 |
| 1973년 2월 12일 | 달러 두 번째 평가절하, 10퍼센트 |
| 1973년 10월 6일 | 욤 키푸르 전쟁 발발; 10월 17일 금수 조치 |
| 1974년 1월 | 아라비안 라이트 고시가 2.90달러에서 11.65달러로 |
| 1974년 6월 26일 | 독일 감독 당국이 헤르슈타트 은행 폐쇄 |
| 1974년 8월 9일 | 닉슨 사임 |
| 1974년 9월 2일 | 종업원퇴직소득보장법 발효 |
| 1974년 10월 3일 | S&P 500이 62.28로 바닥, 48.2퍼센트 하락 |
| 1974년 10월 8일 | 프랭클린 내셔널 뱅크 지급불능 판정 |
| 1974년 12월 6일 | 다우가 577.60으로 바닥 |
| 1976년 8월 | 퍼스트 인덱스 인베스트먼트 트러스트가 1,130만 달러로 출범 |
같은 양상은 1990년대 말에 되풀이되었습니다. 인터넷 거품은 뒤에 쌓인 역사가 훨씬 짧은 기업들에 비슷한 배수를 붙였고, 2020년 이후에는 더 좁은 대형 기술주 집합에서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때마다 가격을 옹호하는 논리는 1972년 모건 개런티의 신탁 담당자들이 내놓았던 것과 같았습니다. 사업은 견고하고 성장은 실재하므로 배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 번 가운데 두 번은 사업이 실제로 견고했고 성장도 실재했습니다.
폴라로이드는 2001년 10월 파산을 신청했습니다. 에이본은 2020년 약 20억 달러에 나투라 앤드 코에 매각되었는데, 명목 달러로 따지면 1972년의 시장 가치보다 적은 금액이었습니다. 고점에서 이익의 46.4배에 사들여 끝내 팔지 않은 코카콜라는 그 보유자를 부자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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