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휘트니와 1938년, 월가 최고 인맥의 몰락
1938년 3월 8일 화요일, 개장 5분 뒤 뉴욕증권거래소 입회장의 징이 다시 울리며 거래가 멈췄습니다. 거래소 회장 찰스 R. 게이가 연단에 올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던 천 명 남짓한 회원들 앞에서 두 건의 공고를 읽었습니다.
첫 번째는 절차적인 것이었습니다. 리처드 휘트니 상회가 채무를 이행할 수 없다고 거래소에 통지했고, 그 회사는 지급불능으로 정지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결코 절차적이지 않았습니다. 게이는 3월 1일 거래소가 그 회사 수석 파트너의 "공정하고 형평한 거래 원칙에 명백히 반하는 행위"에 관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밝혔습니다. 혐의는 전날 오후 운영위원회 특별회의에 회부되었습니다. 심리는 3월 17일로 잡혔습니다.
리처드 휘트니는 8년 반 전 바로 그 입회장에 서서, 홀로 공황을 멈춘 인물로 신문과 라디오에서, 그리고 게이의 말을 듣고 있던 모든 이의 기억 속에서 칭송받았습니다. 그 뒤 그는 지금 자신을 정지시키는 그 기관의 회장을 다섯 차례 연임했습니다. 그는 J.P. 모건 상회 수석 파트너의 동생이었고, 그 순간 수백만 달러의 지급불능 상태에 놓인 절도범이었습니다.
그로턴, 하버드, 그리고 입회장의 자리
리처드 휘트니는 1888년, 굳이 자기소개를 할 필요가 없는 매사추세츠 상류사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그로턴을 거쳐 하버드에 진학해 조정을 했고 포슬리언 클럽에 받아들여졌습니다. 그가 뉴욕에 도착할 때 지녔던 것은 당대 증권업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자산, 곧 사람들이 알아보는 이름과 모건 가문 안에 있는 형이었습니다.
여섯 살 위인 조지 휘트니는 J.P. 모건 상회의 파트너가 되었고 훗날 그 회사의 사장에 올랐습니다. 리처드는 1912년 거래소 회원권을 사들였고, 시장의 화려하지 않은 영역을 전문으로 하는 자신의 채권 회사 리처드 휘트니 상회를 세웠습니다. 그의 회사는 입회장에서 모건의 중개 업무를 맡았는데, 이는 월가 23번지가 공개시장에서 무언가를 사거나 팔고자 할 때 그 일을 리처드 휘트니의 직원들이 처리했다는 뜻입니다. 그보다 값진 광고는 없었을 것입니다.
1928년 무렵 그는 거래소 부회장이자 지배층의 붙박이였습니다. 그는 사냥을 즐겼고 뉴저지에 시골 별장을 두었으며, 브로드가와 월가가 만나는 모퉁이의 그 기관을 미국 산업의 가격을 정하는 사교 클럽쯤으로 대했습니다. 그런 관점에는 긴 내력이 있었으며, 그 뿌리는 1792년 버튼우드 협정에 서명한 스물네 명의 중개인이 서로에게 우대 조건으로 거래하기로 합의한 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를 만든 호가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시세 표시기가 한참 밀리고 방청석에서 눈물이 터져 나오던 가운데 은행가들이 월가 23번지에 모였습니다. 모건의 토머스 W. 러몬트, 내셔널 시티의 찰스 E. 미첼, 체이스의 앨버트 위긴, 개런티 트러스트의 윌리엄 포터, 뱅커스 트러스트의 슈어드 프로서였습니다. 그들은 시장을 떠받치는 데 약 2,000만 달러를 투입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러몬트는 로비에서 기다리던 기자들 앞에 나와 미국 금융사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을 절제된 표현을 내놓았습니다. "증권거래소에 약간의 투매가 있었습니다."
1시 30분쯤 휘트니는 입회장을 가로질러 US 스틸이 거래되는 제2호 포스트로 걸어가 가격을 물었습니다. 스틸은 200 아래로 호가되고 있었습니다. "스틸 1만 주를 205에 사겠습니다." 직전 체결가보다 높은 값이었습니다. 이어 그는 포스트를 옮겨 다니며 다른 주요 종목 열두어 개에 비슷한 주문을 냈습니다. 그는 몇 분 만에 은행가들이 약정한 금액 전부에 가까운 돈을 썼습니다.
그것은 하루 동안 통했습니다. 거래량은 사상 최대인 1,290만 주에 달했고,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장중 훨씬 낮았다가 전일 종가보다 6포인트가량만 내린 299.47로 마감했습니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25년 뒤 그 제2호 포스트로의 행진을 대단히 수준 높은 연극으로, 그것이 만들어낸 반등을 주말까지만 지속된 착시로 다루었습니다(Galbraith, 1955). 다음 주 화요일 지수는 230.07까지 내려갔고, 검은 화요일이 된 그 매도세는 은행가들의 자금 풀을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살아남은 것은 그 이미지였습니다. 휘트니는 가장 참혹한 시간에 입회장에서 눈에 띈 사람이었고, 거래소는 이듬해 그를 회장으로 선출했습니다.
워싱턴에 맞선 다섯 번의 임기
1930년부터 1935년까지 휘트니는 뉴욕증권거래소를 이끌며 스스로 미국에서 연방 증권 규제에 가장 두드러지게 반대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워싱턴에서 증언했고, 전국 라디오로 중계되는 연설을 하며 전국을 돌았으며, 가능한 모든 자리에서 거래소의 자체 규정으로 충분하며 정부 감독은 이해하지도 못하는 기구를 망가뜨릴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의회는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1933년 증권법은 이미 신규 발행에 등록과 인증된 회계를 요구하고 있었고, 그 정치적 힘의 상당 부분은 그 전해에 무너진 이바르 크뤼게르의 성냥 제국에서 나왔습니다. 한편 퍼디낸드 페코라의 조사관들은 대형 상업은행의 증권 자회사들을 해부하고 있었고, 그 작업은 글래스-스티걸법에 따른 예금은행과 인수업무의 분리로 이어졌습니다.
증권거래위원회를 설립할 법안에 맞서기 위해 1934년 2월 22일 상원 은행통화위원회에 출석한 휘트니는, 의원들이 고칠 수도 없는 정교한 기구를 파괴하려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여러분은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이후 그의 전기 작가들이 줄곧 인용하게 될 문장을 내놓았습니다. "거래소는 완벽한 기관입니다." 그는 연방 규제가 월가를 빈 공터로 만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증권거래법은 1934년 6월에 통과되었습니다. 조엘 셀리그먼은 그 시기를 다룬 역사서에서 휘트니의 운동을 구 거래소 지도부의 결정적 오판으로 봅니다. 규제 반대를 개인적 위신의 문제로 만듦으로써, 그는 자신의 몰락이 곧 규제의 근거가 되도록 보장한 셈이었습니다(Seligman, 1982).
저지 라이트닝
사적인 그는 공적인 그와 달랐습니다. 리처드 휘트니 상회는 자본이 얇은 소규모 채권 회사였고, 그 파트너는 더 신중한 사람이라면 손대지 않았을 사업—플로리다 토지, 미시시피 이탄 부식토, 광물 콜로이드—에 약했습니다.
금주법이 끝나가던 1933년, 그는 F. 킹슬리 로데월드라는 동업자와 함께 디스틸드 리커스 코퍼레이션을 설립하고, 뉴저지에 있던 40년 된 힐딕 사이다·식초 공장을 사들여 저지 라이트닝이라는 이름으로 사과 브랜디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대중은 그 주식을 열광적으로 사들여 45.40달러까지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대중은 사과 브랜디를 그다지 마시지 않았습니다. 어릴수록 거칠고, 13년의 금주 시대를 막 벗어난 미국인들이 특별히 원하던 술도 아니었습니다. 휘트니는 회사에 팔 것을 더 쥐여 주려고 캐나다산 호밀 위스키 10만 6,000갤런을 수입했습니다. 그것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1936년에 이르러 주가는 11달러 부근이었고, 휘트니는 그 주식을 사들이고 있었습니다. 그와 그의 측근들은 결국 발행주식 14만 8,750주의 압도적 다수를 보유하게 되었고, 이는 특정한 형태의 문제를 낳았습니다. 그 주식은 단지 잘못된 투자가 아니라 담보였습니다. 은행들은 호가에 가까운 값으로 그 주식을 담보 삼아 돈을 빌려주었고, 그 호가는 휘트니가 유지하려고 기꺼이 지불하는 값 그 자체였습니다. 디스틸드 리커스의 시세를 떠받치는 일은 곧 자신의 차입 기반을 떠받치는 일이었으며, 새로 살 때마다 새 차입이 필요했고 그 차입은 다시 더 많은 떠받침을 요구했습니다.
1937~38년 겨울 내내 그는 주가를 9에 붙들어 두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빌리기
마지막 몇 달의 산술은 거래소가 그의 재무를 정리한 자료에 남아 있습니다. 1938년 3월 첫째 주까지 약 넉 달 동안 휘트니는 111건의 대출을 따로따로 성사시켰고 그 합계는 2,736만 1,500달러였습니다. 그중 2,500만 달러 넘는 금액이 상업은행 차입이었으며, 끊임없이 차환되어 새 대출이 만기가 돌아온 대출을 갚았습니다.
| 1938년 3월 초 기준 채무 | 금액 |
|---|---|
| 직전 넉 달간 성사시킨 대출(111건) | 27,361,500달러 |
| 조지 휘트니에 대한 무담보 채무 | 2,897,000달러 |
| J.P. 모건 상회에 대한 무담보 채무 | 474,000달러 |
| 그 밖의 무담보 채무 | 약 1,000,000달러 |
Source: Dow Jones & Company closing values
휘트니의 포지션은 위 차트의 마지막 두 점 사이에서 무너졌습니다. 시장은 1937년 3월 10일 194.40으로 정점을 찍은 뒤, 1937~38년 경기후퇴가 자리 잡으면서 열세 달 만에 가치의 절반 가까이를 잃었습니다. 빌린 돈으로 유동성 없는 지배 지분을 떠안고 있던 사람에게 그 국면을 통과할 길은 없었고, 그해 겨울 그는 자기 소유 자산을 담보로 빌리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기금들
그가 손을 뻗은 것은 신탁으로 맡겨진 기금이었고, 그에게는 그런 기금이 셋 있었습니다.
뉴욕증권거래소 유족기금은 사망한 회원의 가족에게 2만 달러를 지급했으며 회원 부담금으로 운영되었습니다. 휘트니는 1935년부터 그 수탁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기금에서 65만 7,000달러어치 채권과 22만 1,508달러의 현금을 빼냈습니다. 그는 뉴욕 요트클럽의 회계 담당이기도 했으며, 그 영구기금에서 10만 9,384달러를 개인 대출 담보로 돌려썼습니다. 세 번째는 그가 수탁자로 있던 장인 조지 R. 셸던의 유산이었고, 거기서 약 10만 5,000달러어치 주식과 채권이 같은 길을 갔습니다.
그는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절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존 브룩스가 심리 기록에서 재구성한 서술에 따르면, 끝까지 견지된 휘트니의 일관된 입장은 자신이 되돌려 놓을 것으로 예상한 증권을 담보로 빌렸을 뿐이며, 자기 정도의 지위를 가진 사람이 그것을 되돌려 놓는 일은 희망이 아니라 확실성이라는 것이었습니다(Brooks, 1969). 맬컴 매케이는 수십 년 뒤 가족 문서를 훑으며 그의 심리에 대해 같은 결론에, 그의 인맥이 무엇을 가능하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더 어두운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믿음은 진심이었고, 진심이었던 이유는 그의 세계에서 누구도 그에게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MacKay, 2013).
침묵의 규약
아는 사람은 있었습니다. 1937년 가을, 조지 휘트니는 동생이 유족기금 소유의 채권을 담보로 잡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토머스 러몬트와 상의했고, 두 사람은 증권을 되돌려 놓도록 리처드에게 돈을 내주었으며, 이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거래소에도, 수탁자들에게도, 증권거래위원회에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절도 자체보다 바로 그 결정을, 증권거래위원회의 1938년 보고서는 이 사건의 추문으로 다루었습니다. 보고서는 거래소 지배층 내부의 침묵의 규약을 기술했고, 휘트니의 재무에 관한 이상 징후가 이미 1935년부터 드러나 있었음을 지적했으며, 스스로를 규율한다던 기관이 자기 전임 회장을 규율하기를 거부했다고 짚었습니다. 1937년 9월 증권거래위원장이 된 윌리엄 O. 더글러스는 몇 달째 자율규제에 관한 논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휘트니는 그것을 완성된 형태로 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거래소 감사역은 1938년 3월 1일 횡령의 증거를 확정했습니다. 혐의는 3월 7일 운영위원회로 넘어갔고, 게이는 8일 연단에서 그것을 읽었습니다.
그랜드 센트럴
당시 뉴욕 카운티 지방검사이던 토머스 E. 듀이는 즉시 움직였습니다. 휘트니는 3월 10일 소추되었고, 11일 셸던 신탁 증권과 관련한 중절도로 기소되었으며, 12일 요트클럽 기금 건으로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유죄를 인정했고 5년에서 10년 형을 받았습니다.
1938년 4월 12일, 약 6,000명이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에 모여 수갑을 찬 그로턴·하버드 출신 남자가 무장 경관에 둘러싸여 오시닝행 열차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사진기자들은 여정의 양쪽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형기 중 40개월을 복역했고 1941년 8월 11일 싱싱 교도소에서 가석방되었습니다.
| 항목 | 1938년 3월 이전 | 이후 |
|---|---|---|
| 거래소 회장직 | 무보수, 현업 회원이 겸임 | 유급 전임, 전문 실무진 배치 |
| 운영위원회 | 회원으로만 구성 | 외부 대표 참여 |
| 회원사 재무 | 자체 규율, 외부 보고 없음 | 보고 및 검사 의무 |
| 휘트니의 지위 | 5선 회장, 모건의 입회장 브로커 | 유죄 확정, 제명, 증권업 금지 |
그가 완벽하다고 부른 기관
거래소 개편을 검토할 위원회는 이미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컨티넨털 캔 회장 칼 콘웨이가 이를 이끌었고, 간사는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 주니어라는 서른한 살의 회원으로, 1938년 1월에 나온 보고서를 그가 작성했습니다. 보고서는 전문 실무진을 거느린 유급 회장과 운영위원회 내 외부 대표를 권고했는데, 이는 구 기득권층이 회원 기관에 대한 모욕이라며 여러 해 동안 거부해 온 바로 그 개혁이었습니다.
여섯 주 뒤 게이가 연단에서 휘트니의 자격 정지를 읽었고, 저항은 증발했습니다. 더글러스는 개편의 대안이 증권거래위원회가 거래소를 직접 운영하는 것임을 분명히 해 두었습니다. 1938년 7월 1일 마틴은 뉴욕증권거래소 역사상 최초의 유급 회장이 되었고, 13년 뒤에는 연방준비제도를 19년간 이끌게 됩니다.
휘트니 사건이 미국의 증권 규제를 만들어낸 것은 아닙니다. 증권법과 증권거래법은 이미 법이었고 증권거래위원회도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한 일은 거래소가 그 법들을 제 식구에게 집행하리라 믿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매듭지은 것이었습니다. 1937년 가을 조지 휘트니의 침묵이 그 답을 주었습니다. 아니라는 답이었습니다. 그 답이야말로 오늘날의 거래소가 매매하지 않는 유급 임원과 회원 바깥에서 뽑힌 외부 이사, 그리고 검사 대상이 아닌 쪽에 보고하는 검사 기능을 갖춘 이유입니다. 일흔 해 뒤, 존경받던 내부자가 동료들이 반쯤 의심하면서도 신고하지 않은 사기를 벌여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버나드 메이도프 체포 이후 자율규제를 둘러싼 같은 논쟁이 되풀이됩니다.
1941년 8월 싱싱 교도소 정문을 나선 휘트니는 매사추세츠주 반스터블로 갔고, 그곳에는 낙농장을 관리하는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농장 주인은 주 부지사를 지낸 캐스퍼 G. 베이컨이었고, 보수는 월 200달러와 숙식이었습니다. 가석방 조건은 그가 증권업에 발을 들이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는 훗날 플로리다에서 섬유 회사를 운영했고, 형이 대신 갚아 준 돈을 되갚았으며, 1974년 12월 5일 뉴저지주 파힐스에서 여든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1934년 2월 상원에서 거래소가 완벽한 기관이라고 말했습니다. 4년 4개월 뒤 거래소는 그가 결코 필요 없다고 우기던 유급 회장과 외부 이사와 검사관을 갖추었고, 스틸 1만 주를 205에 사겠다고 외쳤던 그 남자는 케이프코드에서 월 200달러를 받으며 젖소의 젖을 짜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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