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2026-09-14·11 min read·Reviewed 2026-09-14T00:00:00.000Z

나스닥: 1971년 화면 호가망이 장외시장을 바꾼 과정

시장 구조사례 연구

나스닥 단말기는 1971년 2월부터 장외 호가를 공개했지만, 딜러들이 그 호가를 정하던 관행까지 드러내지는 못했습니다. 가장 활발히 거래되던 100개 종목의 스프레드가 호가 단위가 허용하는 최소폭의 두 배였다는 사실은 1994년 두 학자가 소수 단위를 세어 본 뒤에야 밝혀졌습니다.

NasdaqMarket StructureOver The Counter MarketBid Ask SpreadsOrder Handling RulesSec Enforcement
출처: Historical records

편집자 노트

호가를 공개하는 일과 그 호가를 규율하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나스닥 스프레드를 4분의 1달러에 붙들어 둔 관행은 화면 호가 23년을 견디다가 소수 단위를 세어 본 계산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목차

나스닥: 1971년 화면 호가망이 장외시장을 바꾼 과정

1971년 2월 8일, 코네티컷주 트럼불의 한 기술자가 단말기 망의 전원을 올렸습니다. 그 화면에는 500곳이 넘는 증권사가 약 2,500개 장외 종목에 대해 얼마를 지불할 의사가 있는지가 사상 처음으로 표시되었습니다. 덴버의 브로커도 이제 몇 분 전 뉴욕에서 정해진 가격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 가격으로 거래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전히 전화를 들어야 했습니다.

화면에 표시된 가격과 사람이 실제로 지켜 줄 가격 사이의 이 간극이, 전미증권업협회(NASD)가 막 자동화한 시장의 이후 27년을 규정했습니다. 그 간극은 두 학자가 데이터베이스에서 소수 단위를 세어 보고, 연방 반독점국이 소장을 작성하고, 37개 증권사가 10억 달러가 넘는 돈을 지급한 뒤에야 메워졌습니다.

공표된 가격이 없던 시장

단말기가 등장하기 전, 장외시장의 호가는 종이에 인쇄되었습니다. 전국호가국(National Quotation Bureau)은 매일 아침 핑크시트를 찍어 냈습니다. 수천 개 비상장 종목에 대한 딜러 호가가 수백 쪽에 담겼고, 우편으로 배포되었으며, 일반 투자자가 아니라 업계를 위한 값이었고, 고객이 손에 쥘 무렵에는 이미 낡은 정보였습니다. 어떤 주식이 얼마짜리냐고 물은 개인 투자자는 브로커에게서 숫자 하나를 받았을 뿐,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의회는 1961년 9월 이 구조에 대한 조사를 명령하면서 증권시장 연구에 75만 달러를 배정했습니다. 위원회 출신 변호사였던 밀턴 코언이 책임자로 영입되었고, 그는 정부 조사로는 이례적인 수준의 독립성을 요구했습니다. 자신의 조사단은 결과를 위원회에 보고하되, 다섯 명의 위원이 먼저 승인해야 하는 절차는 두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렇게 나온 특별연구(Special Study)는 약 3,000쪽에 이르렀고 1963년 의회에 제출되었습니다(Cohen, 1963). 장외시장을 다룬 부분은 호가가 도매용에 국한되고, 딜러별로 흩어져 있으며, 고객이 검증할 수 없는 상태라고 진단했습니다.

그 권고는 1964년 증권법 개정으로 이어져, 규모가 큰 비상장 기업에도 등록과 정기 공시 의무가 확대되었습니다. 호가 자체는 업계의 몫으로 남겨졌고, NASD는 딜러 호가를 전자적으로 모아 되돌려 보내 주는 기계를 만들기 위해 벙커 라모(Bunker Ramo)와 계약했습니다.

세 단계의 시야

1971년 2월에 가동된 것은 거래소가 아니라 호가 표시 장치였습니다. 벙커 라모의 시스템은 이용자를 등급으로 나누었고, 기술보다 이 등급 구분이 더 중요했습니다.

접근 등급이용자볼 수 있던 것
레벨 I지점의 소매 브로커대표 내부 호가 — 딜러 이름 없이 최우선 매수·매도가만
레벨 II기관 트레이더와 대형 증권사시장조성자별 매수·매도 호가 전체, 이름 포함
레벨 III등록 시장조성자레벨 II에 더해 자신의 호가를 입력·정정할 권한

고객의 브로커는 레벨 I에서 요약본을 보았습니다. 거래 상대편에 선 딜러는 레벨 III에서 전체 호가창을 보았고 경쟁자들의 위치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화면이 핑크시트를 대체했지만, 딜링을 수익성 있게 만들어 주던 정보 비대칭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NASD는 가격의 표시를 자동화하면서 가격의 협상은 전화에 남겨 둔 셈이었습니다.

그래도 시장은 성장했습니다. 체결된 거래를 실시간으로 보고하는 제도는 1982년 나스닥 전국시장(National Market) 지정과 함께 대형 종목부터 도입되었고, 이로써 고객은 딜러가 사겠다고 말한 값이 아니라 실제로 체결된 값을 처음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액 주문의 자동 체결은 1984년 12월 소액주문체결시스템(SOES)이 25개 종목을 대상으로 문을 열면서 뒤따랐고, 1,000주 이하 주문을 시장조성자가 게시한 호가에 맞춰 체결했습니다.

SOES 참여는 자율이었습니다. 이 대목은 3년 동안 시험받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받지 않은 전화

1987년 10월 19일 주식시장은 하루 만에 5분의 1이 빠졌고, 나스닥 딜러망은 거래소 플로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을 멈췄습니다. 매수할 뜻이 없던 시장조성자들은 그저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낸 주문이 오후까지 체결되지 않은 채 남았습니다. 게시된 호가를 지킬 의무는 문서상으로 존재했지만 그것을 강제할 장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매도 압력을 흡수해 낸 뉴욕의 스페셜리스트 제도와의 비교는 나스닥에 불리했고, 규제 당국의 대응은 딜러의 재량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1988년 6월부터 전국시장 종목의 시장조성자에게 SOES 참여가 의무화되었습니다. 게시된 호가는 딜러가 전화를 받든 받지 않든 소액 주문에 대해 자동으로 체결되어야 했습니다. 같은 해 출범한 셀렉트넷(SelectNet)은 대형 주문의 협상까지 화면으로 옮겼습니다.

딜러들은 이 변화를 싫어했고, 곧 이를 파고드는 트레이더 집단이 생겨났습니다. 시장조성자가 호가를 갱신하기도 전에 낡은 호가를 SOES로 쳐 가는 업체들이었고, 업계에서는 이들을 SOES 밴딧이라 불렀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지만, 이들의 존재 자체가 딜러들의 호가가 딜러들의 주장만큼 날카롭지 않다는 증거였습니다.

Nasdaq Composite closing milestones, 1971–1995

Source: Nasdaq Composite closing milestones

출범 당시 이 시스템에 주어진 지수는 1971년 2월 5일 100.00으로 시작해 1974년 10월 3일 54.87까지 내려갔습니다. 이후 다시 닿은 적이 없는 종가 저점입니다. 지수가 200을 넘어선 것은 1980년 11월 13일에 이르러서였습니다. 500은 1991년 4월 12일에, 1,000은 1995년 7월 17일에 통과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나스닥은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애플, 시스코를 상장사로 거느렸고, 뉴욕증권거래소보다 먼저 미래에 도달한 시장이라는 평가를 흔히 받았습니다.

두 학자가 소수 단위를 세다

밴더빌트 대학의 윌리엄 크리스티와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폴 슐츠는 누구를 조사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은 달러의 8분의 1 단위로 호가가 매겨지던 시장에서 호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원리상 스프레드는 8분의 1, 곧 12.5센트까지 좁아질 수 있었고, 두 사람은 가장 활발히 거래되는 나스닥 100개 종목의 호가 끝자리 분포를 계산했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데이터에 난 구멍이었습니다. 홀수 8분의 1로 끝나는 호가 — 8분의 1, 8분의 3, 8분의 5, 8분의 7 — 는 그들의 표현으로 100개 종목 중 70개에서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애플 컴퓨터와 로터스 디벨로프먼트도 그 안에 있었습니다. 딜러들은 4분의 1 단위로만 호가를 냈습니다. 홀수 8분의 1을 피하는 호가는 25센트보다 좁아질 수 없었고, 이는 호가 단위가 허용하는 최소폭의 두 배였습니다.

이런 양상을 만드는 데 합의는 필요하지 않았고, 크리스티와 슐츠도 합의를 찾아냈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논문은 활발히 거래되는 나스닥 종목의 시장조성자들이 홀수 8분의 1 호가를 피함으로써 최소 25센트의 스프레드를 유지하려 암묵적으로 담합했다는 가설을 기각할 수 없다고 적었습니다(Christie and Schultz, 1994). 모두가 지키고 아무도 강제하지 않는 관행이 카르텔과 똑같은 산술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신문들은 1994년 5월 26일과 27일에 이 발견을 보도했습니다. 며칠 안에 해당 종목의 딜러들은 홀수 8분의 1로 호가를 내기 시작했고, 그 종목들의 스프레드는 하룻밤 사이에 거의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크리스티는 제프리 해리스, 슐츠와 함께 시장조성자들이 왜 홀수 8분의 1 호가를 피하기를 그만두었는지를 묻는 후속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답은 분명했습니다. 누군가가 세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관행이 반독점국과 마주하다

민사와 규제 두 갈래의 조사가 뒤따랐고, 양쪽 모두 두 학자의 산술을 받아들였습니다.

반독점국은 1996년 7월 17일 나스닥 종목의 시장조성 업체들을 상대로 셔먼법 제1조에 따른 민사 소장을 제출했습니다. 소장은 이들 사이에 일부 종목의 내부 스프레드를 부풀린 "호가 관행"을 따르기로 하는 "공통의 양해"가 있었다고 적시했습니다. 회합이나 문서 합의를 문제 삼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소장이 그린 것은, 서로의 호가를 매일 필요로 하는 딜러 사회의 일상적 압력을 통해 참여자들이 체득하고 관철해 온 양해였습니다.

위원회와 NASD의 합의는 3주 뒤에 나왔습니다. 1996년 8월 8일 공표된 증권거래법 제21조(a)항 보고서는, 나스닥 시장조성자들이 고객이 치르는 거래 비용을 자주 높이는 가격 관행을 따랐고, NASD가 감독해야 할 회사들을 상대로 자기 규정을 집행하지 못했다고 판단했습니다. NASD는 제재금 대신 5년에 걸쳐 규제와 감시에 1억 달러를 추가 지출하기로 했습니다. 합의를 발표한 아서 레빗은 이 실패를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자율규제의 실패로 규정했습니다(Levitt, 1996).

지배구조 문제는 이미 내부에서 진단된 바 있었습니다. 1994년 11월 NASD 이사회가 직접 임명한, 전 상원의원 워런 러드먼이 이끈 특별위원회는 1995년 9월 15일 보고서를 내고 협회의 구조가 "브로커·딜러 업계를 규제하는 일과 나스닥 주식시장을 운영하는 일 사이의 구분을 흐려 놓았다"고 지적했습니다(Rudman, 1995). 한 조직이 시장을 운영하면서 그 시장에서 돈을 버는 딜러들을 단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위원회는 두 기능을 분리하라고 권고했고, NASD는 별도의 규제 자회사를 세워 이를 따랐습니다.

민사 소송은 더 오래 걸렸고 비용도 더 컸습니다. 시장조성자들을 상대로 한 집단소송은 10억 2,700만 달러에 합의되었고, 1998년 11월 9일 연방 판사의 승인을 받아 미국 내 37개 증권사가 지급했습니다. 당시까지 민사 반독점 배상으로는 최대 규모였습니다.

호가를 다시 쓰다

오래 남은 것은 시장 배관의 개혁이었습니다. 1996년 8월 채택된 주문 처리 규정(Order Handling Rules)은 1997년 1월 20일 상장 종목과 일부 나스닥 종목에 먼저 발효되었고, 그해 안에 나머지 시장으로 단계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핵심은 두 조항이었습니다. 딜러 자신의 호가보다 유리한 가격의 고객 지정가 주문은 딜러가 쥐고 있지 말고 공개해야 했습니다. 이는 고객이 시장조성자를 상대로 거래하는 대신 그와 직접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또 사설 전자거래 시스템에 더 유리한 가격을 올려 둔 딜러는 그 가격을 나스닥 공개 호가에도 표시해야 했습니다. 전문가에게는 좁은 시장을, 고객에게는 넓은 시장을 제시하던 관행이 끝난 것입니다.

항목1997년 이전주문 처리 규정 이후
고객 지정가 주문딜러가 보유, 미공개딜러 호가보다 유리하면 공개 호가에 표시
사설 거래 시스템의 가격가입자에게만 공개나스닥 호가에 반영
활발한 종목의 실질 최소 스프레드관행상 4분의 1달러8분의 1 이하, 2001년부터는 소수점
내부 가격을 정할 수 있는 주체등록 시장조성자지정가 주문을 낸 모든 투자자

측정된 효과는 컸습니다. 이 개혁을 다룬 가장 널리 인용되는 연구는 제시 스프레드와 실효 스프레드가 "시장의 질을 해치지 않으면서 크게 낮아졌다"고 결론지었습니다(Barclay et al., 1999). 딜러들이 경고했던 심도의 상실 없이 거래 비용이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2001년 미국 시장 전반에서 마무리된 소수점 호가는 최소 단위를 다시 줄였고, 이 규정이 공개 호가로 끌어낸 전자통신망(ECN)들은 오늘날 미국 주식 거래량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거래 장소로 성장했습니다.

나스닥 자신도 호가망에서 거래소로 가는 여정을 마쳤습니다. NASD는 나스닥을 분리했고, 나스닥은 전국 증권거래소로 등록했으며, 한때 딜러의 가격을 보여 주기만 하던 화면이 그 가격에 맞춰 체결하는 화면이 되었습니다. 런던은 10년 앞서 자신의 시장을 화면 중심으로 재편해 호가 시스템을 켠 지 몇 주 만에 거래소 플로어를 없앴고, 1960년대 말 후선 업무의 붕괴에서 시작된 미국의 자동화는 더 느린 길을 돌아 같은 목적지에 닿았습니다.

화면이 드러낸 것

나스닥의 창설 전제는 가격을 공표하면 가격을 만드는 사람들이 스스로 규율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제는 23년 동안 절반만 작동했습니다. 호가는 눈에 보이고, 끊기지 않고, 전국적인 것이 되었지만, 그 호가가 어떻게 정해지는지를 다스리던 관행은 보이지 않는 채로 남았습니다. 호가 끝자리의 분포를 들여다보라고 요구하는 규정이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1994년 크리스티와 슐츠가 들여다본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기술적으로 가장 앞선 딜러 시장이었고, 미국에서 가장 활발히 거래되는 주식들에 대해 자기 호가 단위가 허용하는 최소폭의 두 배로 호가를 내고 있었습니다. 다음 10년의 활황을 규정하게 될 기업들이 이 시장에 상장되어 있었고, 뒤이어 등장한 완전 자동화 시장들은 경쟁하는 전자 호가라는 이 구조를 물려받았습니다.

1971년 2월에 100.00이던 지수는 1,000을 넘어설 무렵 미국 기술의 자신감을 상징하는 숫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도 확인해 볼 생각을 하지 않은 숫자는 그보다 작았습니다. 1달러의 8분의 1, 100개 종목에서 사라져 있던 그 값어치가 10억 달러였습니다.

교육 목적. 투자 조언 아님.